Open Letter to Church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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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죽을 자리로 끌려가는 사람을 건져 주고, 살해될 사람을 돕는 인색하지 말아라.  너는 그것이 '내가 아니라' 생각하며 살겠지만, 마음을 헤아리시는 주께서 어찌 너의 마음을 모르시겠느냐? 너의 목숨을 지키시는 주께서 알고 계시지 않겠느냐? 그분은 사람의 행실대로 갚으실 것이다.” 잠언 24:11-12


제가 살아가면서 항상 고민하는 문제는, 하나님이 존재하시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북한에 계시는가 안계시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지면을 통해 제가 어떻게 해서 북한인권운동에 동참하게 되었는지, 왜 가끔은 포기하고 싶은지, 하지만 왜 이 싸움을 계속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인권 운동 동참의 계기


워싱턴에 위치한 유태인 대학살 기념박물관을 방문했을때, 저는 방문객들이 고개를 흔들면서 “다시 있어서는 안될 일이야” 하고 다짐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열게된 조선저널 닷 컴(Chosunjournal.com)은 현재 북한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인터넷 가상 박물관을 통하여 알림으로서, 희생당하는 사람의 수를 줄이고, 탈출에 성공하는 사람의 수를 늘이며, 또한 미래에 실제의 돌과 벽돌로 이루어진 기념관을 만들기위한 실험장 같은 곳입니다.

 

저희는 시시각각 일어나고 있는 북한의 극악한 행위들을 일간 뉴스에 발행하는 일을 하는 동시에, 북한의 고아들이 지하조직망을 통하여 안전한 나라로 탈출 할 수 있도록 자금을 모으고 있습니다. 또한 구조자, 탈북자, 정부 공무원들과 언론매체를 연결하는 통신망을 구축하는 일을 하고, 북한의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교회나 대학교에서 증언을 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합니다.  이와 더불어 중국대사관에서의 항의운동을 조직하고, 앞으로 탈북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안통과를 로비하고 있으며, 탈북자들에게 관대한 정책을 펼치도록 중국 고위관직자들에게 청언하는일도 추진중에 있습니다.   

 

저는 잠언 24 11절과 12절로 인하여 저에게 재현되는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두려움이 북한 인권상황에 대한 온라인 박물관을 처음으로 만들고 관리하는 일을 시작하게 하였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싶습니다.  이 성경 한 구절로 인해, 저는 “다시 있어서는 안될 일이야” 하는 말이 그저 저 자신의 양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저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음성임을 깨달았습니다. 

 

왜 가끔은 포기하고 싶은가


 엘리 비젤의 ‘모이쉐 더 비틀 인 나이트(Moishe the Beetle in Night)’에 대한 기억이 저의 마음을 떠나지 않습니다.  북한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유아 살해와 망명을 시도하다가 잡혀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매일매일 들려주는 일이 헛수고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저는 조선저널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 6:10)” 했던 옛 선지자들 처럼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하였습니다. 2001 7 8일 조선저널 논설에,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에 관심이 없다고 함은 편리한 거짓말일 뿐입니다.  사실은 상관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지적했습니다. 3년 동안 수십만의 방문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북한에서 계속되는 잔악한 행위를 널리 알리는 일을 하지 못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만난 북한 인권 운동가 한 분이, “기독교는 맘이 약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목발과 같은 존재일 뿐”이라고 말씀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차라리 그 말이 사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의 자유가 있는 나라의 대부분 교회들이, 어차피 죽을때 천국에만 가면 된다는 식의 신앙관으로 교인들의 마음을 무력하게 만들어서 세상의 고통에 참여하지 못하게 막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신앙관이 아닐까요?

 

디트리히 본회퍼는 독일 교회가 히틀러에 대항하여 정치적인 관여를 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한탄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차별받는 흑인들을 동정하면서도 인종차별제도를 폐지하자는 정치적 활동에 동참하지 않는 백인 목사님들을 책망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오늘날 기독교의 모습이 아닙니까?  저는 안위적인 신앙을 고수하는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일에 지쳐갑니다. “예수님은 주님” [1] 이라는 기독교의 기본진리를 부인하는 사람들과 같이 찬양을 하는 것도 지쳤습니다.   이러한 영혼들이 살수 있습니까?  주님만이 아십니다. 

 

저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시는 하나님 ( 10:17)”에 대한 강한 믿음을 바탕으로 인권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땅의 노예생활에서 해방시키신데에는 400년이라는 시간의 간격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저는 이제 점점 수십만명의 이산가족이 자식, 부모, 형제를 영영 만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저는 또 수만명의 기독교인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 북한 어린이들을 구하는데 동참할 것이라는 생각을 서서히 접게 됩니다.  자기중심적인 한국인과 재미동포 한 세대가 바뀌고 나서야 북한사람들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다다를 수 있겠다고 생각하면 정말로 가슴이 아파옵니다.   

 

왜 이 싸움을 계속하는가

 

하나님의 주권이 이 땅에서 새롭게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몸소 인간이신 예수님이 되시고,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12:28, 11:12, :4:21).  하나님의 귄세는 현재 이 땅 위의 사회 정의( 42:1)와 평화( 2:4) 속에서도 나타나는데,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오늘날 영적인 영역에서 뿐만이 아니라 창조물의 사회적( 3:28), 정치적( 14:5), 경제적( 2:45) 영역에도 관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복음을 진심으로 믿기 때문에 제가 지금의 싸움에서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북한의 이러한 현실속에서도 저는 하나님의 행하심과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결과적으로 완전하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조선저널 사람들이 네 명의 북한 고아들을 구조하는 일을 도왔을 때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의 맛을 미리 볼 수 있었습니다.  중국에 계신 목사님들이 탈북자들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구속과 암살의 위협을 받는 중에도 협력을 통해 치유하시는 십자가의 권능을 재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 남아프리카, 필리핀, 덴마크에 이르기까지 수천개의 교회가 눈물로 북한을 위한 기도 드리는 것을 보면서, 그들의 영적인 탄식속에서(8:22), 약속된 세상의 구원, 그 첫 열매를 보았습니다.  국제연합이 평양의 “구조적이고 만연된 심각한 인권침해”를 비난하도록 동원되었을 때도, 소리없이 희생당하고 있는 자들을 위로하실 하나님의 권세를 보왔습니다.  동방의 예루살렘에 남겨진 사람들과 만나서 기도하게 되었을 때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정말 “모든 나라와 민족과 백성과 방언 (7:9)” 을 포함할 것이라는 확신을 다시 한번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교회들이 탈북자들을 위해 주거, 교육, 일자리 등을 마련해 주는 것을 보면서, 저는 그리스도께서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심 ( 2:14)” 이라고 하신 말씀이 복음의 진리로서 제 귓가에아멘으로 울려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북한의 수용소들과 생체실험과 대기아가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은  증거라 한다면 위의 예들은 하나님이 계심을 증명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이 금요일이라면 일요일이 곧 올 것입니다. 

 

제가 계속해서 끈기를 가지고 노력할 수 있는 것은, 현재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십자가 에 달리신 예수님의 발 아래에서 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세 만으로도 성령의 권능을 덧입고 하나님이 갈보리에서 역사하셨던 것과 같이 북한에서도 역사하시리라는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제가 이러한 관점에 서있기 때문에 무자비한 북한간수들에 게의치 않고 “다 이루었다”하는 예수님의 외침을 믿음으로 예수님이 고난당하신 날에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하셨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북한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 사실로 인해서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것같이 하지아니함을 확신합니다(고전9:23-27).  다시 말하면, 제가 이기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상을 받을 자격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오늘날 싸워서 이겨야 하는 상대는 이미 2000년 전에 패배했기 때문입니다. 

 

 

    

[1] “세상은 세상이고, 교회는 교회지만, 이 세상과 세상 안의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 있음을 선포하며,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교회에서부터 세상의 모든 민족으로 퍼져 나아가야한다. 여기에 “교회의 ‘정치적’ 특성이 있다.” 디히트리히 본회퍼, 제자도의 대가 (런던:SCM, 1959), p.314.


이 논설에 담긴 의견은 온전히 글쓴이의 것이며 조선저널의 의견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음을 밝혀드립니다 (2004 4 5, 편집부).